첫 데이트의 설렘이 성폭력 의혹으로 바뀐 하룻밤… 진실을 판단하기 전에 우리가 배워야 할 것들

처음 만난 두 남녀가 서로에게 호감을 느낀다. 대화는 자연스럽고 웃음은 끊이지 않는다. 음식과 술을 나누며 서로의 매력을 확인한 두 사람. 데이트가 끝날 무렵 쏟아지는 비와 잡히지 않는 택시는 두 사람을 조금 더 가까워지게 만든다.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평범한 만남이다. 어쩌면 오래 기억될 사랑의 시작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음 날, 모든 것이 달라진다.
여성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 성관계를 당했다고 주장한다. 남성은 강제적인 행위가 없었다며 억울함을 호소한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간을 보낸 두 사람이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다.
지난 10월 30일 첫 방송된 MBC 드라마 ‘라이어’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한다.
드라마는 시청자에게 끊임없이 질문한다.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가. 누구의 기억을 믿어야 하는가.
2회에서는 거짓말탐지기 조사 결과마저 반전을 만들어낸다. 남성이 아닌 여성의 진술에 거짓 반응이 있다는 결과가 제시된다. 그러나 여성은 자신의 기억과 주장을 쉽게 철회하지 않는다. 남성 역시 결백을 주장하지만 사건이 알려지면서 의사로서 쌓아온 명예와 평온했던 일상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드라마가 보여주는 것은 단순한 진실게임이 아니다.
진실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는데, 누군가의 삶은 이미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누가 거짓말을 하는가’만이 아니다
‘라이어’가 흥미로운 이유는 두 사람의 진술이 충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드라마를 단순한 심리 스릴러로만 소비하기에는 그 안에 담긴 사회적 질문이 너무 무겁다.
극 중 여성은 그날 밤 자신의 의사에 반하는 일이 있었다고 주장하고, 약물이 사용됐을 가능성까지 의심한다.
여기서 우리는 ‘스파이킹(Spiking)’이라는 용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스파이킹은 상대방이 알지 못하거나 동의하지 않은 상태에서 음료나 음식 등에 약물 또는 알코올을 넣거나, 다른 수단으로 이러한 물질을 투여하는 행위를 말한다.
GHB와 같은 약물이 관련될 수 있으며, 일부 물질은 의식 저하나 판단력 손상, 기억 공백 등을 일으킬 수 있다.
스파이킹은 반드시 성범죄로 이어지는 행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타인의 신체와 의사결정 능력에 동의 없이 개입한다는 점 자체가 심각한 문제다.
문제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이를 즉시 알아차리기 어려울 수 있다는 사실이다.
기억이 흐릿하다. 술을 많이 마시지 않았는데도 갑자기 몸을 가누기 어렵다. 특정 시간대의 기억이 사라졌다. 다음 날 설명하기 어려운 신체적 이상을 느낀다.
이런 상황에서 당사자는 무엇을 의심해야 하는지조차 모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증상만으로 약물 투여를 확정할 수는 없다. 음주, 질환 등 다른 원인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추측이나 선입견이 아니라 신속한 의료적 평가와 객관적인 확인이 중요하다.
거짓말탐지기는 진실을 판결하지 않는다
드라마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가운데 하나는 거짓말탐지기 조사다.
검사 결과가 어느 한쪽의 진술을 의심하게 만들자 진실의 무게추가 순식간에 움직인다.
하지만 현실에서 거짓말탐지기는 진실을 확정하는 기계가 아니다. 검사 과정에서 측정되는 생리적 반응은 거짓말뿐 아니라 불안과 긴장 등 여러 요인의 영향을 받는다.
그 결과만으로 피해 주장이 허위라고 단정하거나, 반대로 누군가의 범죄를 확정해서는 안 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두 가지 원칙을 동시에 지켜야 한다.
성폭력이나 약물범죄를 호소하는 사람의 말을 함부로 부정하거나 조롱해서는 안 된다. 동시에 객관적인 조사와 법적 판단이 이뤄지기 전까지 상대방을 범죄자로 단정해서도 안 된다.
두 원칙은 서로 충돌하는 것이 아니다.
피해를 호소하는 사람을 보호하는 것과 상대방의 무죄추정 원칙을 존중하는 것은 동시에 가능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종종 그렇지 못하다.
누군가의 진술은 곧바로 확신이 되고, 의혹은 사실처럼 퍼지며, 대중은 조사 결과보다 먼저 판결을 내린다.
한쪽에는 피해를 인정받지 못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다. 다른 한쪽에는 결백을 입증하기도 전에 사회적으로 매장될 수 있다는 공포가 있다.
드라마 속 두 인물이 겪는 고통은 이러한 현실을 날카롭게 드러낸다.
스파이킹이라는 이름이 필요한 이유
우리는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 수많은 이름을 사용한다.
학교폭력, 가정폭력, 데이트폭력, 디지털 성범죄, 스토킹.
이러한 용어는 단순한 명칭이 아니다. 특정한 위험을 사회가 인식하고, 예방교육을 마련하고, 신고와 대응체계를 구성하는 출발점이 된다.
그렇다면 누군가 몰래 약물을 투여해 상대의 의식과 판단 능력을 손상시키는 행위는 어떠한가.
우리는 이를 흔히 약물범죄, 마약범죄 또는 약물을 이용한 성범죄라는 넓은 범주에서 설명해 왔다.
물론 기존 법률로도 구체적인 행위에 따라 처벌할 수 있다. 그러나 법적 처벌 가능성과 시민이 위험을 알아차리고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은 별개의 문제다.
스파이킹이라는 명칭을 사회적으로 정착시켜야 하는 이유는 새로운 단어를 유행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다. 위험을 구체적으로 인식하고, 예방하고, 대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름을 모르면 위험을 설명하기 어렵다. 위험을 설명하기 어려우면 무엇을 교육해야 하는지도 모호해진다.
약물을 이용한 범죄를 단순히 ‘술자리에서 벌어진 일’이나 ‘남녀 사이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인식부터 바뀌어야 한다.
스파이킹은 술집과 유흥시설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일상적인 만남과 사적인 공간에서도 경계해야 할 수 있는 문제다.
사건이 발생했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스파이킹 교육이 필요한 가장 현실적인 이유는 피해 의심 상황에서의 초기 대응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의식 저하나 기억 공백이 나타났을 때 단순히 술에 취했다고 생각하고 귀가한다면 어떻게 될까.
약물의 종류에 따라 체내에서 검출할 수 있는 시간이 짧을 수 있다. 의료기관을 찾거나 수사기관에 도움을 요청하는 일이 지연되면 중요한 증거를 확보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
그래서 최소한의 대응 원칙은 누구나 알고 있어야 한다.
의심되는 상황에서는 추가 섭취를 중단하고 안전한 곳으로 이동해야 한다. 의식 저하나 호흡 이상이 있다면 즉시 119에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범죄가 의심된다면 112에 신고하고, 의료진에게 약물 투여 가능성을 알려야 한다.
성폭력 의혹이 있다면 해바라기센터와 같은 전문기관을 통해 의료·상담·증거채취 지원을 받을 수 있다.
또한 가능하다면 당시의 음료나 용기, 이동 경로, 통신 기록과 주변 CCTV 등 객관적인 자료를 보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교육은 피해가 의심되는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주변인과 현장 종사자, 경찰, 의료진 모두에게 필요한 교육이다.
이상 증세를 보이는 사람을 단순한 주취자로 취급하지 않고, 필요한 도움을 신속하게 연결하는 것. 기억 공백을 호소하는 사람에게 섣불리 단정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는 것. 그리고 수사가 시작되기도 전에 누군가를 가해자로 낙인찍지 않는 것.
그것이 교육을 통해 만들어야 할 사회적 대응 능력이다.
우리는 진실을 판단하는 법보다 먼저 대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드라마 ‘라이어’는 앞으로도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밝혀가는 과정을 통해 시청자의 호기심을 자극할 것이다.
그러나 드라마 밖 현실은 다르다.
현실에서 우리는 다음 회를 기다리며 진실을 확인할 수 없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증거는 사라질 수 있고, 기억은 더 불분명해질 수 있다. 피해를 호소하는 사람은 적절한 보호를 받지 못할 수 있으며, 의혹을 받는 사람은 돌이키기 어려운 사회적 피해를 입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누가 먼저 상대방을 설득하느냐가 아니다.
의심되는 상황에서 신속하게 대응하고, 필요한 증거를 확보하며, 공정하고 전문적인 절차를 통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사회적 준비다.
이제는 스파이킹을 특정 사건에서만 등장하는 낯선 외국어로 남겨둬서는 안 된다.
학교에서는 위험 신호와 도움 요청 방법을 가르치고, 대학과 직장에서는 예방교육을 실시하며, 경찰과 의료기관에서는 초기 대응체계를 더욱 촘촘히 연결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건을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다.
피해를 호소하는 사람을 의심부터 해서도 안 되고, 지목된 사람을 범죄자로 단정해서도 안 된다.
진실을 밝히기 위한 시간은 필요하다. 그러나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는 기다려서는 안 된다.
‘라이어’는 묻는다.
“둘 중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가.”
그러나 이 드라마를 바라보는 우리 사회는 다른 질문을 던져야 한다.
“만약 내 가족이나 친구에게 같은 일이 발생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는가.”
그 질문에 자신 있게 답할 수 없다면, 아직 우리 사회는 충분히 준비되지 않은 것이다.
스파이킹이라는 용어를 알리고 교육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진실이 밝혀지기를 기다리는 사회에서, 진실이 밝혀질 수 있도록 준비하는 사회로 바뀌어야 한다.
필자 | 김민회
리본라인(RIBBONLINE) 대표. 스파이킹 범죄 예방 교육센터 설립을 준비하고 있으며, 약물을 이용한 범죄의 위험성을 알리고 사회적 인식 개선과 예방교육 체계 구축을 위한 활동을 추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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